[코스인코리아닷컴 김세화 기자] 국내 화장품 제조·책임판매업체가 3만여 개로 늘어나고 수출 대상국이 200개 국을 넘어서면서, 화장품 업계의 공급 과잉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브랜드와 제품 수, 기업의 생산능력까지 동시에 확대되면서 경쟁 강도도 높아지는 모습이다.
전통적인 시장 논리대로라면 경쟁 심화에 따른 가격 하락과 수익성 악화가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정반대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화장품 수출은 사상 최대 규모를 경신하고 있으며 코스맥스, 한국콜마 등 국내 주요 ODM 업체의 성장세도 이어지고 있다.
30일 유진투자증권은 국내 화장품 산업 분석 보고서를 통해 공급 확대에도 K뷰티의 성장이 이어지는 배경으로 ‘월렛셰어(Wallet Share)’ 효과를 꼽았다. 새로운 국가와 소비자를 확보해 시장 점유율(Market Share)을 높이는 '마켓셰어(Market Share)’ 경쟁을 넘어, 기존 소비자들이 미처 충족하지 못했던 숨은 수요를 공략하는 방향으로 성장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국내 화장품 산업의 수요 기반은 더 이상 특정 지역에 집중되지 않는다. 과거 K뷰티의 해외 확장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 크게 의존했다면 최근에는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 일본 등으로 빠르게 분산되고 있다. 한두 개 대형 시장의 성장에 기대기보다, 여러 시장에서 동시에 수요를 확보하는 구조로 바뀌면서 시장의 외연 자체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출 통계에서도 이 같은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1~5월 중소기업 화장품 수출도 전년 동기 대비 28.6% 증가했으며, 유럽, 중남미 등 신시장으로의 수출 확대가 이어졌다. 유진투자증권은 올해 K-뷰티의 지역별 수출 비중을 유럽 24%, 중화권 23%(중국 14%), 미국 20%, 동남아시아 10%, 일본 7% 등으로 집계했다. 공급이 늘면서 경쟁 브랜드도 많아졌지만, 동시에 K-뷰티가 공략할 수 있는 시장과 소비자층도 함께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첫 번째 성장축은 지역과 유통채널의 확장이다. 세계 최대의 화장품 시장 미국은 여전히 K뷰티의 핵심 시장이다. 유진투자증권에 따르면 미국 화장품 시장 규모는 1,139억 달러로 글로벌 시장의 19.6%를 차지한다. 그러나시장 규모가 큰 만큼 주요 브랜드와 유통망이 이미 자리 잡은 성숙 시장(Mature Market)으로, 경쟁이 치열하고 신규 진입도 쉽지 않다.
이에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는 곳이 유럽이다. 유진투자증권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주요 5개국의 화장품 시장 규모를 768억 달러로 추산한다. 이는 미국 시장의 약 67%에 해당하는 규모다. 개별 국가의 시장 규모는 미국보다 작지만, 주요 시장을 합치면 K뷰티가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소비시장 규모가 상당하다는 의미다.
유통망 역시 지역 확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미국의 주요 판매처인 세포라, 얼타 등 글로벌 유통망은 유럽에서도 광범위한 오프라인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에서 소비자 반응을 확인한 K뷰티 브랜드가 이들의 글로벌 유통망을 활용해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는 방식은 신규 시장 진입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효과로 이어졌다. 한 지역에서 축적한 브랜드 인지도와 소비자 반응, 유통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기가 수월해진 것이다.
두 번째, 소비자층의 확대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K뷰티의 미국 초기 성장에는 아마존, 틱톡숍 등 온라인 채널과 얼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소비자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CVS, 월마트, 코스트코 등 3050세대의 일상적인 소비 동선에 자리 잡은 대형 유통채널로 판매 접점이 확대되고 있다.
온라인에서 바이럴된 제품이 이들 매장의 오프라인 매대에 진입하고, 젊은 소비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구매 경험이 부모 세대와 중장년층으로 확산되면서 K뷰티가 접근할 수 있는 소비자층도 넓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데이터 분석 기업 뉴메레이터(Numerator)에 따르면, 미국에서 K뷰티 제품을 한 번 이상 구매한 가구의 비중은 2020년 8%에서 2026년 25%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재구매율도 25%에서 48%로 상승했다. 즉, 가구 내 K뷰티를 처음 경험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는 동시에, 한 번 구매한 소비자가 다시 제품을 찾는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세 번째 성장축은 카테고리 확장이다. 시장의 성장을 단순히 ‘소비자 수×평균판매가격(ASP)’의 공식으로만 본다면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소비자를 더 확보하거나 가격을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K뷰티는 여기에 구매 빈도와 구매 SKU 수를 더하는 방식으로 소비자 한 명당 매출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에서 K뷰티 구매 침투율이 30% 가까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기존 소비자가 몇 개의 제품을 추가 구매할 것인지가 중요해졌다. 선케어와 토너패드로의 확장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선크림은 미국 소비자에게 자외선 차단 기능에 더해 '촉촉하고 가벼운 사용감'이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고, 토너패드는 토너와 화장솜을 결합한 형태로 기존의 사용 방식 자체를 바꿨다. 새로운 제품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명확하게 포착되지 않았던 수요(Unknown Demand)가 구매로 이어지는 구조다.
카테고리 확장은 브랜드당 SKU 증가로도 나타났다. 과거에는 하나의 히어로 제품으로 소비자를 확보하는 전략이 통했다면, 최근에는 토너·세럼·크림·선케어·마스크 등으로 제품군을 넓히고 헤어·프래그런스·뷰티 디바이스까지 영역을 확장하는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에이피알의 메디큐브는 미국 시장에서 제로 모공 패드, PDRN 세럼, 콜라겐 젤리 크림, PDRN 젤리 마스크 등으로 제품군을 확대했다. 하나의 제품으로 확보한 소비자에게 여러 카테고리의 제품을 추가로 판매하면서 소비 접점을 넓히는 방식이다. 신규 고객을 계속 확보하는 데 드는 비용 부담을 낮추면서 기존 고객의 구매액을 늘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카테고리 확장은 화장품 시장 너머 미용의료 시장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K뷰티 기업의 사업 영역은 화장품에서 시술 후 케어, 뷰티 디바이스, 원료 등으로 넓어지고 있다. 원료와 기술을 기반으로 화장품을 개발하고 시술 후 관리 제품과 디바이스까지 연결하는 방식이다.
미국 선케어 시장에서는 규제 변화가 새로운 성장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 6월 베모트리지놀(bemotrizinol)을 OTC 선스크린 모노그래프의 허용 활성성분에 추가했으며, 해당 조치는 8월 9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새로운 UV 필터의 활용이 가능해지면서 미국 시장에서도 원료와 처방 기술을 결합한 제품 차별화 여지가 커졌다. 제품 수가 늘어나는 공급 경쟁 속에서 원료와 제형 기술을 활용해 차별화된 제품을 구현하는 역량이 중요해지고 있다.
다만, 공급 확대와 시장의 성장이 브랜드와 ODM에 미치는 영향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경쟁 제품이 늘어나는 만큼 확보한 소비자를 반복 구매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해니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브랜드의 성장 경로를 ‘바이럴(Viral) 단계’와 ‘재구매(Repeat Purchase) 단계’로 구분하면서 “바이럴 단계에 머무는 브랜드와 재구매 단계로 넘어간 브랜드는 매출 구성과 영업이익률에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결국 재구매율이 브랜드의 이익률 개선 여부를 가르는 핵심 변수”라고 분석했다.
바이럴 단계에서는 매출 대부분이 신규 고객에서 발생해 매출 증가에 따라 마케팅 비용도 함께 늘어난다. 반면 재구매 단계에서는 기존 고객의 매출 비중이 높아지면서 신규 고객 확보에 필요한 비용 부담이 낮아진다. 실제로 미국 DTC(소비자 직접판매) 업계에서는 매출 규모가 커질수록 광고비 비중이 25~35%에서 7~15% 수준까지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반면 브랜드 수 증가는 ODM 업체에는 잠재 고객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K뷰티 브랜드가 늘어날수록 자체 생산시설을 갖추지 않은 브랜드가 제품 기획과 생산을 ODM 업체에 맡길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최근 국내 주요 ODM 업체들은 인디 브랜드 성장과 해외 판매 확대의 수혜를 받고 있다.

2025년 한국콜마의 매출은 2조 7,224억원으로 전년 대비 11.0% 증가했고, 코스맥스 매출은 2조3,988억원으로 10.7% 늘었다. 양사 모두 사상 최대 수준의 매출을 기록했다. 코스맥스의 매출 상위 20개 고객 가운데 인디 브랜드 비중이 2021년 40%에서 2025년 65%까지 높아졌으며, 한국콜마도 2025년 기준 상위 20개 고객의 인디 브랜드 매출 비중이 70%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다만 브랜드 증가가 ODM 업체의 수익성 확대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ODM 업체 역시 늘어난 브랜드를 놓고 고객 확보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브랜드가 제품 차별화를 요구할수록 ODM의 경쟁력도 단순한 생산능력을 넘어 원료, 처방, 제형 개발 역량으로 확대된다.
이 때문에 글로벌 화장품 ODM 업계 최상위권인 한국의 ODM사들은 단순 생산을 넘어 기술 경쟁력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코스맥스가 누적 특허 출원 약 2,000건, 등록 약 700건을 보유하고, 한국콜마가 선케어 관련 특허만 70여 건을 축적한 것도 이 같은 흐름과 맞닿아 있다.
결국 공급 확대와 시장 성장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재의 시장 환경에서 브랜드와 ODM이 마주한 과제는 다르다. 브랜드는 단기적인 바이럴에 그치지 않고 기존 고객의 재구매를 이끌어내는 데 집중해야 하며, ODM은 늘어난 브랜드 수요를 확보하는 동시에 기술 역량을 통해 고객사의 제품 차별화를 뒷받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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