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료 | 인사이트코리아 INCENCIA AI
올리브영 토너 매대 앞에 서 본다. 수십 종이 꽂혀 있고, 뒤집어 성분표를 보면 나이아신아마이드·판테놀·병풀추출물이 반복된다. 용기 모양도, 카피의 문법도 서로 닮았다. 온라인몰의 선택지는 더 늘어난다. 그런데 이 많은 제품 중 이름을 남기는 브랜드는 손에 꼽는다.
질문 두 개가 남는다. 이렇게 많은데 왜 하나같이 비슷한가. 그리고 살아남을 그 몇 개를, 만들기 전에 알아볼 수 있는가. 두 질문의 답은 같은 곳에 있다 — 어떤 컨셉이 통할지 출시 전에 가려내는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다.
낙타와 바늘구멍 — 통과할 낙타를 고르는 일
신제품이 시장에 안착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수사가 아니라 숫자가 그렇게 말한다. 소비재 신제품의 성공률이 20%를 밑돈다는 추정은 업계에서 오래 인용돼 왔고, 최근 자료도 방향이 다르지 않다. 글로벌 리서치 기업 입소스(Ipsos)가 20만 건 이상 축적한 컨셉 테스트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컨셉의 40%는 소비자가 늘 사던 제품을 두고 갈아탈 만큼의 관련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대에 오르기 전에 이미 열에 넷은 걸러져야 할 컨셉이라는 뜻이다.
바늘구멍은 지금도 더 좁아지는 중이다. 스킨케어는 신제품이 가장 많이 쏟아지는 카테고리이고, 레티놀·나이아신아마이드·PDRN·엑소좀처럼 성분 하나가 판을 재편하는 주기가 몇 달 단위로 짧아졌다. 컨셉 하나를 검증하는 데 4~8주를 쓰는 사이 니즈도 경쟁 구도도 바뀐다. 게다가 스킨케어는 압도적 1위가 없는 카테고리다. 절대 강자가 자리를 지키는 시장이라면 느린 검증도 버티지만, 여기선 머뭇거리는 사이 그 자리를 더 빨리 확인하고 출시한 쪽이 채운다.
이 조건에서 실무자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실패하는가”가 아니다. 실패의 원인은 사후에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고, 그때는 이미 늦다. 진짜 질문은 “열 개 중 통과할 그 한둘을, 만들기 전에 어떻게 고를 것인가”다. 확률이 낮다는 사실 자체는 바꿀 수 없지만, 무엇을 내보낼지 고르는 정확도는 바꿀 수 있다. 대박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될 것을 골라 자원을 몰아준 결과인 경우가 훨씬 많다.
왜 다 비슷한가 — 제품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
첫 번째 질문의 답은 산업 구조에 있다. 국내 화장품 책임판매업체는 3만 곳을 넘어섰지만, 자체 생산 시설을 갖춘 곳은 10% 남짓이다. 나머지는 ODM·OEM에 개발과 생산을 위탁한다. 책임판매업체 수가 10년간 연평균 20%대로 늘어나는 동안 생산 실적 증가율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는 분석도 있다. 브랜드는 폭증했지만 제형을 만드는 곳은 그만큼 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과는 매대에서 그대로 보인다. 같은 시기 유행하는 성분과 제형이 여러 브랜드 제품에 동시에 실린다. ODM의 기술력이 문제가 아니라 제품 단계에서 만들 수 있는 차별화의 폭이 구조적으로 좁아졌다는 것이 문제다. 처방으로 벌릴 수 있는 격차가 줄어들수록, 승부는 그 앞 단계로 옮겨간다 — 같은 원료로 누구의, 어떤 상황을, 왜 해결하는 제품이라고 규정할 것인가. 컨셉이 유일하게 남은 차별화 지점이 되는 이유다.
그런데 정작 이 결정적인 단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하다. 점수가 나쁘지 않으면 진행하고 애매하면 다시 이야기한다. ‘나쁘지 않다’의 기준은 대개 담당자의 기억이거나, 회의실에서 가장 확신 있게 말한 사람의 목소리다.
블랙박스 ① — 구입의사 82%였는데 왜 실패했나
가장 흔한 장면은 이렇다. 모바일 간편조사로 300명에게 컨셉을 보여주고 82%를 받는다. 그 숫자를 LLM에 넣고 해석을 묻는다. “매우 긍정적인 수치입니다.” 그럴듯한 문장이 그대로 보고서에 붙는다. 그리고 제품은 팔리지 않는다. 숫자는 세 가지를 감추고 있었다.
첫째, 말과 행동은 다르다. 조사에서 “사겠다”고 답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매대 앞에서 경쟁 제품 수십 개와 나란히 놓이고 가격표를 볼 때 진짜 선택이 일어난다. 마케팅 리서치에서 오래 다뤄온 진술과 행동의 괴리(say-do gap)다. 구입의사가 실제 구매보다 높게 측정되는 것은 조사 설계의 결함이 아니라 모든 사전조사가 안고 있는 전제다.
둘째, 응답 자체가 이미 오염돼 있다. 미국 Greenbook 조사에서 전체 설문 응답자의 33%가 불성실 또는 사기성 응답으로 분류됐다. 오픈응답 칸의 자판 문자열, 척도 중간값만 기계적으로 이어 찍는 직선 응답(straight-lining) 패턴이 정제 없이 집계에 섞인다. 82%는 이 잡음을 통과한 뒤의 값이다.
셋째, 그리고 결정적으로, 절대 수치에는 애초에 기준이 없다. 82%가 높은지 낮은지 판단하려면 무엇과 비교할지가 먼저 정해져야 한다. LLM은 그 비교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갖고 있지 않은 채로도 문장은 만들어낸다 — 82가 100에 가까우니 긍정적이라는 식이다. 이건 판정이 아니라 숫자에 대한 상식적 감상이고, 회의실의 “괜찮은데요?”와 같은 층위다.
관심은 폭발했지만 지갑은 열리지 않았다 — 글로시에 플레이
말과 행동의 괴리를 비싸게 확인한 사례가 있다. 2019년 3월 글로시에(Glossier)는 색조 전용 자매 브랜드 ‘플레이(Play)’를 요란하게 내놨다. 신제품 예고만으로 온라인이 들썩이며 초기 관심도는 충분했다. 그러나 판매는 화제를 따라가지 못했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라인 전체가 정리됐다. 업계 분석에서 지적된 결정적 대목은 구매자 상당수가 이미 글로시에 고객이었다는 점이다. 신규 고객 유입이라는 목표가 애초에 달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과잉 포장과 생분해되지 않는 글리터를 둘러싼 비판도 겹쳤다.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고객층에게 보낸 신호가 정반대였던 셈이다. 창업자 에밀리 와이스는 뒤에 별도 브랜드를 만들 게 아니라 기존 라인에 색조를 더했으면 됐다고 인정했고, 투자사 파트너 커스틴 그린은 이 경험을 두고 “더 싸게 배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심도와 구입의사, 그리고 실제 매출은 서로 다른 지표라는 사실을 한 개 브랜드를 접으며 배운 것이다.

블랙박스 ② — 데이터가 말하는 진짜 수치
어떤 조사 방식의 절대 수치도 그 자체로 참값은 아니다. 온라인 패널에는 불성실 응답과 과장이 섞이고, 대면조사에는 면접원 효과가 있다. 방식마다 고유한 응답 성향이 있다는 뜻이지, 그 방식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판단 근거로 쓸 수 있느냐는 그 성향이 일정하게 반복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 기준에서 최근 주목받는 것이 AI 합성패널(synthetic panel)이다. 실제 소비자 응답 데이터에서 역추출한 프로파일로 가상 응답자를 구성해 조사를 돌리는 방식이다. 동일 조건·동일 표본으로 사람 패널과 나란히 돌린 병행 조사에서 AI 합성패널은 사람의 응답과 높은 일관성을 갖는 합리적 평가를 내놓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지표에 따라 사람보다 후하거나 박한 구간이 있지만, 그 차이는 들쭉날쭉한 잡음이 아니라 방향과 크기가 일정한 체계적 패턴이다. 불성실 응답이나 직선 응답 같은 오염도 개입하지 않는다.
체계적이라는 말은 실무적으로 결정적이다. 무작위 오차는 되돌릴 수 없지만 일정한 패턴은 변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표별로 그 차이를 규명해 Norm을 조정하면, AI 합성패널로 얻은 결과를 기존에 축적해 온 기준선·사내 Hurdle과 같은 잣대 위에 그대로 올려놓고 판정할 수 있다. 새 기준을 다시 만들 필요도, 기존 자산을 버릴 필요도 없다. 대면조사에서 온라인패널로 넘어가던 시기에도 업계는 같은 재조정을 거쳤다. 리쿠르팅 없이 당일~1일 만에 끝나는 속도는 그때 따라온다.
결론은 명확하다. 데이터가 말하는 진짜 수치는 응답 결과에 찍힌 절대 수치가 아니라 동일 카테고리에서 표준화된 기준선(Norm) 위에서의 상대 위치다.
표1 동일한 62%가 카테고리 기준선에 따라 정반대로 판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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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 |
구입의사 | 카테고리 | 카테고리 Norm | 상대 위치 | 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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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안 |
62% | 데일리 수분크림 | 66% | 하위 35% | NO-GO |
| B안 | 62% | 고기능 안티에이징 앰플 | 51% | 상위 12% | GO |
두 컨셉의 점수는 소수점까지 같다. 다른 것은 그 점수가 놓인 카테고리의 기준선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진짜 문제가 드러난다. 절대 수치만 보면 두 안은 아예 구별되지 않는다. 구별할 근거가 없으니 결정은 다른 포인트로 넘어간다 — 시장이 더 커 보이는 쪽, 익숙한 쪽, 회의에서 목소리가 큰 쪽. 그렇게 상위 12%짜리 컨셉이 접히고 하위 35%짜리가 매대로 나간다.
넷을 나란히 세우면
지금까지 나온 판정 방식을 한 표에 올려봤다. 마케터의 감, 간편조사에 LLM 해석을 붙이는 방식, 외부 리서처, 그리고 네 번째로 출시 여부 판정만 전담하는 에이전트다. 마지막 것은 컨셉 개발부터 출시 판정까지를 한 흐름으로 묶은 신제품 개발 전용 에이전트군(NPD LAB)에 속한다. 신제품 개발 프로세스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스테이지-게이트(Stage-Gate) 모델에서 각 단계를 통과시킬지 결정하는 관문 역할이라 ‘게이트키퍼(Gatekeeper)’라 불린다. 컨셉 결과 DB와 사내 통과 기준을 함께 참조해 GO·HOLD·NO-GO를 가른다.
그림1 같은 컨셉보드를 놓고 GO/NO-GO를 판정하는 네 가지 접근

앞의 셋은 접근 방식이 다를 뿐, 기준선 칸이 비어 있다는 점에서 같다. 감으로 찍든, AI로 묻든, 외부에 맡기든 — 기준선이 없으면 결과는 같다.
답은 누구나 준다 — 그 판단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이 세 방식은 모두 한 문장으로 답을 내놓는다. “괜찮은데요.” “긍정적인 수치입니다.” “가능성 있어 보입니다.” 문장을 만드는 데는 비용도 시간도 거의 들지 않는다. 답은 누구나 준다. 문제는 그 문장에 책임이 따라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범용 LLM은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다. 외부 대행사의 책임은 대체로 보고서 납품에서 끝난다. 회의에서 가장 확신 있게 말한 사람도 6개월 뒤에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남는 것은 기업이 떠안는 청구서뿐이다.
청구서는 세 갈래로 날아온다. 첫째는 금액이다. 개발비와 금형, 초도 물량, 광고비, 확보한 유통 슬롯이 한 번의 판단에 함께 묶인다. 둘째는 기회다. 잘못된 컨셉에 6개월을 쓰는 동안 겨냥했던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더 빨리 확인하고 더 빨리 출시한 경쟁사가 채운다. 셋째는 흘러간 시간이다. 되돌아왔을 때 시장은 그대로 있지 않다. 성분과 소구가 몇 달 단위로 바뀌는 카테고리에서는 검증과 재작업에 쓴 시간만큼 고객의 니즈가 이미 이동해 있다. 판정을 미루는 비용을 셈할 때 가장 자주 빠지는 것이 이 세 번째 청구서다.
실험 — 같은 결과지, 다른 판독
레티놀 나이트 세럼 컨셉보드를 그대로 조사에 투입했다. 헤드라인 “첫 주 각질 없이, 고함량 레티놀”, ACB(Accepted Consumer Belief · 소비자가 이미 사실로 받아들이는 전제 — 레티놀은 쓰고 싶은데 초기 각질·따가움 때문에 2주를 못 넘긴다), Benefit(고함량 효과를 초기 자극 구간 없이), RTB(Reason To Believe · 그 약속을 믿을 근거 — 자사 캡슐화 기술 특허, 4주 누적 자극도 시험). 같은 응답 데이터를 두 방식으로 읽어봤다.
표2 5,000개 DB 대비 카테고리 Norm과의 비교 · 구입의사는 Top-2 Box 비율, 나머지는 100점 환산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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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 |
레티놀 세럼 | 스킨케어 세럼 Norm | 판정 |
| 구입의사 (Top-2 Box) | 58% | 54% | Norm 상회 |
| 필요도 | 72 | 68 | Norm 상회 |
| 독특성 · 주목도 | 81 | 63 | 상위권 |
| 신뢰성 | 59 | 71 | Norm 미달 |
| 가격대비가치 | 64 | 65 | 보합 |
| 호감도 · 추천 | 73 | 69 | Norm 상회 |
팀 회의와 LLM은 같은 답을 냈다 —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다, 진행하자.” 틀린 말은 아니다. 여섯 지표 중 네 개가 기준선을 웃돌고 하나는 보합이다. 하지만 이 표에서 진짜 읽어야 할 것은 독특성 81점과 신뢰성 59점이 나란히 있다는 사실이다. 눈에는 확 들어오는데 믿기지는 않는다 — 소비자가 ‘고함량인데 자극이 없다’는 약속을 모순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 조합은 스킨케어에서 특히 위험하다. 독특성이 높으면 초기 구매는 일어난다. 그러나 신뢰성이 받쳐주지 않으면 재구매가 끊기고 리뷰에는 ‘기대만큼은 아니다’가 쌓인다. 게이트키퍼의 판정은 즉시 출시가 아니라 HOLD였다. 고칠 칸은 헤드라인이 아니라 RTB — 임상 수치를 소비자가 체감하는 언어로 다시 쓰거나, 2주차 실사용 후기를 근거로 붙이는 일이다. 절대 수치만 봤다면 이 진단은 나오지 않는다.
그림2 FORECAST 모듈 ‘컨셉 게이트키퍼’ 에이전트의 작업 흐름

이 판정 단계만 따로 떼어, AI 합성패널 조사와 DB 비교·Norm 조정을 하나로 묶은 패키지형 서비스도 나와 있다. 컨셉이 관문을 통과했는지를 확인해 준다는 뜻에서 ‘컨셉 패스(CONCEPT PASS)’로 불리는 형태다. 전담 리서치 조직을 두기 어려운 인디·중견 브랜드가 컨셉 다안을 빠르게 압축하거나, 출시 승인 직전 마지막 확인을 위해 찾는 경우가 많다.
언제 알았느냐가 값을 정한다
소비자 신호를 제때 읽어 판을 뒤집은 국내 사례도 있다. 티르티르(TIRTIR)의 마스크핏 레드 쿠션은 2023년만 해도 밝은 톤 위주의 3개 호수로 팔렸다. 미국 시장에서 짙은 피부톤의 뷰티 크리에이터들이 “가장 어두운 호수도 맞지 않다”는 영상을 올리며 문제를 제기하자, 브랜드는 개발로 되돌아갔다. 호수는 2024년 2월 9개, 5월 20개, 6월 30개, 8월에 40개로 늘었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3개에서 40개로 확장한 것이다. 결과는 아마존 파운데이션 부문 1위였다.
잘 대응한 사례로 읽히지만, 판정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함의가 남는다. 40개 호수라는 답은 시장에 나간 뒤에야 나왔다. 미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호수 구성의 적정성을 출시 전에 검증했다면, 네 차례의 확장과 그 사이의 재고·금형·유통 재협상은 한 번으로 끝났을 것이다. 성공한 사례에서도 교정의 타이밍이 출시 전이냐 후냐에 따라 비용은 자릿수가 달라진다.
두 사례의 차이는 브랜드의 역량이 아니라 질문을 던진 시점에 있다. 글로시에는 관심도를 구입의사로 착각한 채 출시했고, 티르티르는 출시 후에 답을 찾아 빠르게 고쳤다. 같은 질문을 출시 전에 던졌다면 한쪽은 라인을 접지 않았고, 다른 한쪽은 네 번의 확장을 한 번으로 끝내고 그만큼 더 빨리 1위에 올랐을 것이다.
초기에 아는 것이 지름길이다
컨셉이 통과된 순간부터 비용은 계단식으로 뛴다. 처방이 확정되고, 금형이 발주되고, 초도 물량이 생산되고, 유통 협상이 끝난다. 뒤로 갈수록 되돌리는 값이 커질 뿐 아니라 되돌릴 수 있는 항목 자체가 사라진다. 금형이 나온 뒤에 용량을 바꿀 수는 없다. 반대로 컨셉보드 한 장은 그날 다시 쓸 수 있다. 같은 수정인데 값이 자릿수로 다르다.
덜 논의되지만 더 중요한 이점이 있다. 컨셉 단계에서 얻은 답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매대에 올려놓고 반응을 보는 방식은 확실하지만, 그 순간 같은 정보가 경쟁사에게도 넘어간다. 경쟁사는 우리 제품의 판매 데이터로 어떤 소구가 먹히고 어떤 가격대가 받아들여지는지 배운다. 반면 출시 전 검증에서 나온 결론은 우리 회사 안에만 남는다. 실제 응답자를 모집하지 않는 AI 합성패널 방식이라면 컨셉이 외부 개인에게 노출되는 경로 자체가 없다. 시장에 나가기 전에 아는 것은 비용 문제이기 이전에 선점의 문제다.
게다가 이 단계는 아직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다. 제품 단계에서 벌릴 수 있는 격차가 좁아졌다는 것은 앞서 봤다. 그러나 컨셉 단계에서는 타깃도, 사용 상황도, 소구 순서도, 가격대도 전부 열려 있다. 아직 비워둔 자리를 골라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제대로 고른 컨셉 하나가 뒤따르는 모든 투자를 회수한다.
검증을 건너뛰는 이유는 대개 “시간이 없어서”이거나 “비용이 부담돼서”다. 그런데 자료수집이 하루 안에 끝나고 비용 구조도 크게 낮아진 지금, 두 이유 모두 근거가 되기 어렵다. 입소스가 자사 컨셉 테스트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바로는, 컨셉과 제품을 함께 검증한 경우가 어느 한쪽만 단독으로 테스트한 경우보다 성공률이 20% 높게 나타났다. 검증의 밀도가 곧 확률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앞에서 하루를 쓰는 일이, 뒤에서 6개월을 버는 가장 빠른 길이다.
우리 회사에 대입해 본다면 —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그림3 판정 기준선의 부재가 실제로 드러나는 다섯 장면

이 장면들은 담당자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비교 대상이 없는 구조의 문제다. 그리고 이 구조는 한 번 갖추면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진다. 레티놀 세럼의 판정 이력은 다음 세럼·앰플을 판정할 때 비교 대상이 되고, 그다음 프로젝트는 더 촘촘한 기준선 위에서 판단된다. 경쟁사는 같은 모형을 사도 우리 회사의 지난 프로젝트가 만든 기준선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처음의 두 질문으로 돌아온다.
① 왜 다 비슷한가 — 제품 단계에서 벌릴 수 있는 격차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② 살아남을 몇 개를 만들기 전에 알아볼 수 있는가 — 있다. 다만 비교할 기준선을 가진 회사만 그렇다. 기준선이 없으면 감으로 찍든 AI로 묻든 결과는 같다.
바늘구멍은 앞으로도 좁아질 것이다. 다만 어떤 낙타를 세울지는 고를 수 있다. 답은 누구나 준다. 그러나 무엇과 비교해 그렇게 판정했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에만, 책임질 수 있는 답이 된다. 고르는 눈이 정확해질수록 실패한 제품에 묶였을 개발비와 초도 물량은 성공할 제품 쪽으로 옮겨간다. 대박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될 것을 일찍 알아보고 자원을 몰아준 결과로 만들어진다.
컨셉이 통과됐다고 끝난 게 아니다. 이제는 이름을 붙이고, 가격을 매기고, 패키지와 광고 시안을 골라야 한다. 이 결정들도 회의실의 감으로 정할 것인가, 아니면 출시 전에 미리 견주어 볼 방법이 있는가. 다음 회에서는 그 갈림길을 다룬다.
※ 본 기획은 AI 시대 화장품 마케팅 연재의 4회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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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INCENCIA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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