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인코리아닷컴 전문위원 신윤창] 국내 LG전자와 피어리스, 애경산업, 필립스전자, LG생명과학, 세라젬H&B, 종근당건강 등에서 영업과 마케팅 분야를 두루 경험한 바탕으로 화장품 마케팅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과 방향성을 찾아 나간다. 최근 화장품 시장은 코로나와 함께 국내외적인 많은 변화로 그 어느 때보다도 겪어 보지 못했던 경험을 하고 있다. 하루에도 어려운 결단을 몇번이고 내려야 하는 시점에서 필자가 현장에서 느낀 생생한 경험치가 실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편집자>
# 냉정함이 저지하는 행동
내가 다녔던 한양대학교 경영학과에는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캣치 프레이즈(Catch Phrase)가 있다. 젊은 경영학도들에게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두가지는 마치 상반되는 성질처럼 모두 동시에 가지기는 참 힘든 일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학습효과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생산현장에서 신제품을 처음 만들 때보다 같은 제품을 계속 반복해 만들게 되면 노동자들의 숙련도와 업무 친숙도가 증가해 노동력(노동시간)이 감소한다는 것을 경제학에서는 학습효과(Learning Curve Effect)라고 한다.
1968년 보스톤 컨설팅 그룹(BCG)은 학습효과를 경영전략적인 측면에 적용해 경험곡선효과(Experience Curve Effect)를 발표했는데 누적생산량이 매번 2배로 증가함에 따라 평균비용은 일정한 비율로 떨어진다는 개념으로써 회사 전반적인 효율성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경험곡선효과는 2차세계대전 중에 항공기 생산과정에서 처음 발견됐고 그 후 냉장고 생산에서부터 보험산업에 이르기까지 누적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상당히 규칙적으로 그 비용이 하락한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이처럼 우리는 학습과 경험을 통해 반복된 일에 숙련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효율성을 높일 수가 있으며 같거나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문제점이나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위험이 감지될 때, 인간의 좌뇌는 냉철한 이성으로 일을 주저하거나 하지 못하게 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갓난 아이가 왕성한 호기심에 무엇도 모르고 병뚜껑을 먹거나 날카로운 칼에 손을 베어 병원에 실려가는 것은 아직 그 아이에겐 학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런 아픔을 통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면 안 되는 일을 배워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어찌 보면 이성적인 것을 떠나 수만 년 동안 인간이 살아 오면서 DNA에 축적된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과거 원시 수렵사회 때부터 연약한 인간은 강하고 힘센 동물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피할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성능력을 타고 났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으로 일을 함부로 벌이지 않는 안전 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림1 1968년 보스톤 컨설팅 그룹이 발표한 경험 곡선 효과
그런데 이런 냉정한 이성은 자주 열정을 가로 막는다. 때론 냉정이 안 된다는 증거를 수도 없이 제시해도 열정은 일말의 가능성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위험을 감지한 냉정은 다시 열정을 저지하려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용기이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은 그렇게 용기와 신념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한 사람들에 의해 변화돼 움직여 온 것이 사실이다.
장 폴 리히터는 이렇게 말했다. “소심한 자는 위험이 닥치기 전에, 겁쟁이는 위험이 닥쳤을 때, 용기 있는 자는 위험이 지난 후 두려움을 느낀다.”
# 냉철한 분석과 판단이 용기를 낳는다
용기는 무모함과는 다르다. 미국의 윌리엄 셔먼 장군은 위험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과 그 위험을 인내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의지가 용기라고 말했다. 아무 생각이나 계획도 없이 무작정 일부터 저지르는 것이 무모함이라면 용기는 철저한 분석과 계획에 의한 판단력에 바탕을 둔다. 아무렇게 내뱉는 상처 주는 심한 말이 아니라 철저히 조직이나 상대방을 위해 쓴소리의 말을 하거나 하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해내기 위해서는 냉철한 생각에 용기가 뒤 따라야 한다. 용기는 차가운 이성을 열정으로 승화시켜 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냉정과 열정, 그 사이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필자는 40대 중반에 주로 의사가 처방하는 전문의약품을 생산, 판매하는 LG생명과학의 마케팅전략팀에 입사를 했다. 약국에서 파는 게보린이나 인사돌 같은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의약품이 아닌 의사가 처방하는 전문의약품에 대한 경험과 지식도 없고 소비자용 화장품 등의 마케팅을 했던 내가 CEO의 전격적인 발탁에 의해 취직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40대 중반의 나이에 전혀 모르는 분야의 산업으로 회사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도 나름 냉철한 분석에 의해 선택한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
필자는 그때 내 이름 석자를 브랜드로 해 SWOT 분석을 만들었다. 전문의약품이라는 생소하고 어려운 시장과 내부적으로도 경쟁이 치열한 대기업에 그것도 팀원(차장)으로 백의종군하듯 들어가서 “나는 어떤 경쟁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생각과 판단에 대한 SWOT 분석이었다. 그 결과 내 이성은 차갑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제기했고 나의 용기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림2 냉철한 분석과 판단의 유용한 도구인 ‘SWOT 분석’
그리고 무엇보다도 입사 후 계속되는 도전은 기존의 여러 조직과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LG생명과학은 LG화학 의약품사업부에서 연구개발로 태동해 분사한 회사로서 철저히 R&D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이었다. 그러다 보니 R&D와 사업개발팀에서 연구하거나 검토하는 과제들이 시장성 평가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막대한 자금이 투여돼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시장중심의 제품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떤 분야에는 불필요한 제품들이 많았고 어떤 분야에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만 담은 듯이 한 품목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서 자칫 제품 하나의 흥망성쇠에 따라 회사가 좌지우지될 수도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입사 당시 신생팀인 마케팅전략팀에서 내가 CEO에게 직접 하달받은 요지는 R&D와 시장을 연결해 주는 가교가 돼 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제일 처음 R&D와 사업개발팀이 계획하고 있는 미래의 제품에 대해 시장조사와 분석을 통해 시장성 평가를 시작했다. 마케팅전략팀의 모든 구성원은 회사의 미래전략에 중요한 사명과도 같은 일임을 자각하고 매우 열정적으로 전문 의사들과 인터뷰를 하고 다양한 자료를 수집, 분석해서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신의 전문성이라는 고집이 아집처럼 뭉쳐있던 연구원들이나 사업개발부 직원들은 처음엔 우리의 얘기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린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분석적 판단에 의거해 자료와 의견을 제출하며 열정을 잃지 않은 결과, 1년이 지나자 마케팅전략팀은 회사의 주요 전략 과제에서 없어서는 안될 팀으로 자리매김하게 됐고 점차 그 업무영역도 확대됐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적 문화와 주입식 교육방식은 회사에서도 관리와 통제 라는 괴물 같은 관습을 만들어 지금까지 한국 대부분의 기업은 창의와 도전에 투자하는 것보다 효율성, 합리성에 투자해 왔고 해야 하는 일보다 하면 안 되는 일에 더욱 익숙해져 왔다. 그리고 이런 관습은 몸 속의 기생충처럼 점점 크게 자란 ‘대충’을 만들어 우리의 열정을 서서히 갉아먹게 됐다.
그래서 의학과 약학에 대해 전문적이고 이성적 능력이 뛰어난 LG생명과학 직원들도 조직의 벗어날 수 없는 관습에 지배를 받으며 어쩌면 자신의 프로젝트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고객의 눈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잃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상급자가 하라는 일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도 사라졌고 무엇보다도 하기 힘들고 고단한 시장조사 업무는 회피하면서 대충의 타성에 빠져들었고 이를 대신한 것이 마케팅전략팀이된 것이다. 마케팅전략팀에겐 짜여진 관습을 타파하려는 용기와 혁신에 대한 열정이 가득 차있었다.
# 용기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변화와 마찬가지로 용기도 항상 두려움과 함께 살고 있다.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은 용기를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데도 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용기란 두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 두려운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찌 용기란 단어가 만들어졌겠는가? 그리고 그 용기는 이제 직장상사를 위해 회사를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하듯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자신을 위해 발휘해야 한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 내가 바로 서야 조직이 바로 서고 조직이 바로 서야 또한 내가 계속적으로 바로 설 수 있는 바람직한 선순환이 만들어져야 한다.
덱스터 예거는 그의 저서 ‘끝없는 추구’에서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미움을 받는 게 낫다고 했다. 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은 변화할 수 있고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들러는 자유로워질 용기, 평범해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 그리고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조직에서 상사에게 잘못해서 미움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다움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비대면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업무에 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MZ세대들은 알게 됐다. 더욱이 재택근무를 했다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게 된 직장인들은 예전과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됐다. 일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과거 회사에 출근해서 직장동료들과 만나 서로 얼굴 맞대고 치열한 회의를 하고 단합을 했던 문화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열정도 점점 사라져 갔고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란 말도 생겨났다. 조용한 사직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2009년 경제학 심포지엄이었다. 원래는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는게 아니라 언제든 기회만 되면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을 가지고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것을 의미했었다. 한마디로 직장을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소극적으로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용한 사직은 코로나19 이후 더욱 주목을 받으며 그 의미가 변했다. 퇴직하겠다는 마음은 없이 조직 이나 상사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업무만 처리하겠다는 의미다. 2022년 6월 미국에서 갤럽이 직장인 15,9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0%는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고 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채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또 한국에서도 2023년 2월 알바천국이 MZ세대 1,448명 대상의 설문조사 결과, 10명 중 8명은 ‘조용한 사직’에 대해 긍정적(79.7%)이라고 했다.
이전에 업무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일과 가정, 개인의 삶의 밸런스를 중요시하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이라는 사회적 트렌드도 있었지만 경영자 입장에서 조용한 사직이란 말은 워라밸에서 한발 잘못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마디로 상사의 눈치 보며 힘들게 사는 직장생활에서 벗어나서 편하게 할 일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미국에선 이에 대응하듯 조용한 해고(Quiet Fire)라는 말도 나왔다. 조용한 해고는 한마디로 소리 없는 구조조정이다. 직원에게 직접 해고를 통보하지 않고 인사고과를 낮게 주거나 성과급 삭감, 근무지 이전, 대기발령 등 갖은 수단을 총동원해 자발적인 퇴사를 유도하는 형태이다. 사실 이런 건 미국과 달리 근로 기준법에 의거해서 직접 해고통지를 할 수 없는 국내 기업에선 오래전부터 흔한 일이었다.
다만,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코로나19와 최근 거시경제의 어려움으로 경영환경이 어려워진 것도 있지만 경영인들 사이 에서 조용한 사직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면서 직원 고용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 것이란 사실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조용한 사직의 개념을 일을 대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과 환경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일하겠다는 자세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일할 때 확실히 일하고 쉴 때도 제대로 쉬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만 하는 직장인들은 사직서를 가슴에 담고 다시 조용한 사직을 하며 수동적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또한 우리에겐 조용한 사직을 극복할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자신에 대한 깊은 믿음이며 구속과 관습을 타파하는 자유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자유의 날개를 얻었을 때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런 용기는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이빙 선수가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회전을 그리며 뛰어내릴 수 있는 것도 타고난 용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단한 훈련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용기도 객관적인 자료와 준비, 그리고 연습과 훈련을 통해 단련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업도 직원들에게 용기와 열정을 만들 수 있는 훈련과 학습의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도록 조직이나 인사구조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용기를 가지는 일은 기업이 뭔가를 해주기 전에 개인 스스로도 먼저 도전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지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없을 것이 다. 열악한 환경에서 왜군과 싸워 23전 23승이라는 전사에 길이 남을 전승의 기록을 남기며 조선을 지켰다. 그러나 이 정도야 다른 누구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열악한 환경에서 도망가지 않고 용기를 내어 거둔 값진 승리였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더욱 위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시를 들어 보면 실제로 그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고민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 시를 통해 이순신 장군이 모든 사람들이 잠자고 있는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루에 올라 깊은 시름을 하며 애간장을 삭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턱없이 부족한 군수품과 인력으로 전쟁에 패해 많은 병사들을 잃고 왜군에게 조선 땅을 밟게 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은 그를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였고 결국은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와 그를 시기하는 문무백관 들의 명령을 어기더라도 남과 다른 방법으로 승리를 할수 있는 전략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상급자와 타협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오로지 자기다움만으로 승부해 승리를 했다.
이순신 장군의 23전 중 그의 진정한 용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해전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흥행영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바로 명량대첩이다. 당시 조정의 모략으로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고 병졸로서 백의종군을 하게 됐고 원균이 왜군과 대전했으나 대패했다. 그러자 조정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순신 장군을 통제사로 복귀시켰지만 그에게 남은 건 패전 후 남은 12척의 배와 2,400여명의 병사들 뿐이었다. 반면, 적군에게는 330척의 배와 수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있어 어찌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도망가는 것도 상책이라 하며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그림3 열악한 환경에서도 용기를 내어 값진 승리를 이끌어낸 이순신 장군
그러나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런 상황을 우려하는 왕을 오히려 위로하며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전함이 남아 있습니다”고 장계를 올렸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그 유명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말로 비장한 각오를 다진 결과, 해남의 어란포와 명량에서 적군을 대파했는데 이때 조선군사는 단 11명만 전사했고 전함의 피해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인가? 만약 회사에서 제대로 갖추어지지도 않은 인프라와 인력으로 무조건 달성하기 힘든 업무를 맡긴다면 어떻겠는가? 회사를 비난하고 상사를 욕하면서 도대체 왜 내게만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신세한탄만 하다가 회사를 도망치듯 떠나지 않겠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회사가 아닌 자신의 꿈과 미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신세타령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의 기회에 도전할 용기를 내야 할 것이다.
#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용기를 만든다
1996년 필자가 애경산업에서 처음으로 마리끌레르 마케팅팀장이 됐을 때도 그랬다. 마케팅 경험도 없는 그것도 일개 대리에게 갑자기 팀장 자리를 주며 회사의 사활을 건 큰 프로젝트가 맡겨졌다. 당시 회사는 화장품에 한해 회사 인프라도 낙후했으며 전문 인재도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샴푸와 클렌징만 판매했던 당시 유통 대리점에게 전문 색조 중심의 화장품을 이해시키는 일조차도 힘든 벽과도 같아서 마리끌레르는 처음부터 새로운 대리점을 조직하기로 했으니 이 모든 것이 회사를 하나 세우는 것처럼 모두 새로 해야 하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처음 필자는 이것이 기회라는 생각보다 이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하는 생각에 숨이 막혀 왔었다. 새로운 콘셉트(Concept)의 신 브랜드를 한 두 품목도 아니고 수 십 가지 색상의 색조화장품으로 개발하는 것은 적어도 1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7개월뿐이었다. 게다가 나오지도 않은 브랜드를 가지고 미리 새로운 대리점을 모집해야만 하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나는 수퍼모델대회 같은 대규모의 대학생 모델선발 대회도 기획해 출시 전 기대심리를 극대화하는 일도 했다.
만약에 이미 화장품으로 성공한 아모레퍼시픽 같은 회사였다면 큰 어려움 없이 가능했을지도 몰랐겠지만 당시 애경산업의 화장품부문은 대리점 사장이 미리 가맹하고 제품 나올 때까지 기다려 줄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필자는 당시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단 먼저 배우는 게 중요했다. 마케팅을 다시 공부했으며 화장품 용기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내용물의 원료와 색상에 대해 배웠고 협력업체와의 관계도 배웠으며 광고대행사도 처음 접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마케팅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여러 유관부서, R&D, 디자인, 포장개발, 구매, 생산, 영업, 회계 등 회사의 밸류체인(Value Chain) 전 과정을 두루 섭렵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어느 한 부서가 아닌 전사적인 회사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관련부서의 주요 인재들을 차출해 TFT(Task Force Team)를 구성했고 새로운 영업부가 구축되면서 우리는 동일한 꿈을 향한 열정으로 똘똘 뭉치게 돼 마침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 그 결과 2월에 시작된 마리끌레르 화장품은 정확히 7개월만인 8월 말에 출시해 9월 화장품 성수기에 성공적으로 출시됐다.
그림4 이순신 장군의 진정한 용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량대첩’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용기도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용기는 열정을 만들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준다. 당시 마리끌레르팀과 여러 열정적인 TFT 멤버들의 노력으로 애경산업은 화장품사업의 큰 전환점을 얻게 돼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당시에 비록 회사는 내게 남들과 똑같은 월급을 주었지만 나는 회사에서 용기와 열정을 배웠고 나의 도전과 성공의 체험은 애경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삶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천재적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3차원적인 그림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없는 숨겨진 이면을 한 면의 화폭에 담아내어 입체파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했다. 2012년 여름휴가 때 스페인 여행을 갔다가 방문한 피카소 미술관에서 나는 젊은 그가 그렸던 멋진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르네상스풍의 세밀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은 내눈에 보기에 난해한 추상화보다 더 잘 그린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남들과 비슷하게 사진을 보듯 정교하게 잘 그리는 그림을 이미 섭렵한 이 천재에게 그건 더 이상 자기다움이 아니었다. 그 결과 그는 용기를 내어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 중의 한 명이 됐다.
나를 스스로 나답게 만드는 용기를 통해 나는 열정적 인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움도 힘듦도 떨쳐 버릴 수 있는 용기는 열정으로 승화될 수가 있다.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대로 나 자신의 꿈을 향해 용기를 내야 한다.
단돈 1달러의 연봉으로 망하기 일보직전인 애플로 다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과 직관은 여러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윤창 AMH&B 전무
LG전자, 피어리스화장품, 애경산업, 필립스전자, LG생명과학에서 영업과 마케팅 업무를 했다. 이후 세라젬H&B와 종근당건강의 중국법인장과 화장품사업본부장을 지냈다. 특히 세라젬H&B에서는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마케팅 박사학위를 수료한 후 현재 대전대학교 대학원 뷰티건강관리학과 마케팅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신규 화장품회사 AM H&B에서 전무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챌린지로 변화하라', '우당탕탕 중국 이야기', '인식의 싸움', '지금 중요한 것은 마케팅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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